
일상속 지루함은 마흔한 살되어도 나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7월의 찌는 듯한 더위만큼이나 답답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사무실 문을 닫고 돌아온 오피스텔은 사람 냄새 하나 없고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누군가의 온기조차 깃들지 않은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 공허함에 기가 눌려 침대에 몸을 뉘었다. 천장에 맺힌 희미한 그림자들을 헤아리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이날도.. 쉽게 잠이 오진 않았다. 책상에 던져뒀던 스마트폰을 가져올까 생각도 했지만 시간 가는지 모르고 헛 시간을 소비하는게 싫기도 하고 뜬 눈으로 버티는게 싫어 억지로 눈을 감았다. 눈만 감았지 멍하게 버티고 있으니 어느새 머릿속은 온통 지난 일들로 가득해졌다. 자책과 후회의 조각들이 떠돌다, 허상들의 종착역은 찌질했던 첫사랑까지 이르렀다. 이 기억들은 마치 무감각해진 나를 깨우는 자극적인 소재 같았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공기청정기의 윙- 하는 바람 소리는 멀고 아득한 섬의 파도 소리처럼 들려왔다. 창밖의 자동차 소음은 멈추고, 나는 차가운 이불 아래서 세상과 단절되는 감각에 휩싸였다. '찰칵.' 빛이 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의식이 끊겼다. 잠이라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공간으로 이끌리는 예감이 들었다. 낡고 해진 필름처럼 머릿속 화면이 일렁이더니, 세상의 모든 색채가 지워진 흑백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낡고 해진 영화 필름에서 눈을 뜨니 희뿌연 아침 햇살이 창을 비집고 들어와 나무 침대 위로 쏟아졌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자, 익숙하지 않은 침대의 삐걱거림과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낯선 소음이 이곳이 내가 있던 공간과 완전히 다름을 느끼게 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는데, 손끝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내가 기억하는 거칠고 메마른 피부가 아니었다. 찰나의 당혹감에 손을 번쩍 들어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이상했다. 거울을 찾아 비춰보니, 어제 양치하다 마주친 지친 아저씨의 얼굴 대신 낯익으면서도 낯선 십대 소년이 내 눈을 빤히 응시하고 서 있었다. 소년의 얼굴은 익숙한 듯 낯설었고, 생경한 타인을 보는 듯 했다.
"뭐지? 이곳은? 꿈의 시작이 이상하네?"
나는 상황 파악을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뚱뚱이 모니터와 CD-ROM이 달려있는 586 컴퓨터가 보였고, 책장에는 1,2학년 국민학교 교과서부터 중학교 교과서까지 보였다. 컴퓨터 전원을 켜보니 이곳은 1998년, 내가 중학교2학년이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 꿈의 컨셉이 타임슬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낯선 얼굴과 낯선 공간, 그리고 문밖에서 들리는 낯선 사람들의 말소리. 이 이상한 장소가 꿈속의 허상일거라 느꼈지만 뚝 뚝 끊기지 않고 연결되는 현실같은 모습이 신기했다. 잠시 멍하니 있었는데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리고 귀청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안 일어날래? 방학이라고 누워만 있지말고 밥먹어!", 아마도 이소년의 어머니인 듯 했다. "아..네.." 멋쩍게 대답하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그녀는 빤히 얼굴을 쳐다보다 "왜 저래?" 라고 말하시더니 문을 닫고 나가셨다.
이내 내 시아가 페이드 인되면서 전환됐다. 나는 어색하게 가족들과 밥을 먹은 뒤의 상황인 것 같았다. 학원으로 향하는 버스였고, 친구로 보이는 녀석들이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해 창밖을 바라봤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내가 기억하는 그 시절 그 모습과 똑같았다. 이내 학원차는 멈춰섰고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우르르 내렸다.
나도 터벅 터벅 따라 내려 주의를 둘러보는데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했다. 바로 '철없던 과거의 나'와 그리고 그 친구 무리들이였고,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을 향해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내 과거의 모습은 여전히 거칠고,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나는 그들을 피해 벽에 붙어 지나치려는데 저 멀리서 짝사랑했던 그녀, 김지영이 친구들과 함께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였다. 친구들과 대화 나눌때는 저렇게 환하게 웃기도 했구나.. 내가 멍하니 쳐다봐서 그런가 그녀의 시선이 마치 나를 향하는 듯 했고, 꿈인걸 알지만 내 심장이 발작하듯 뛰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일렁였다. "과거의 나"와 그 일행들의 입모양만 보이고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내 학원 건물의 벽이 흐물거리고, 발밑의 콘크리트 바닥이 물처럼 변하는 듯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나는 생생했던 이 모든 감각을 잃고 깊은 어둠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나의 시선은 페이드 아웃되어 버렸다.
* 이 글을 창작물로 인물, 사건, 구체적인 시기 등은 모두 가상의 내용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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