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간의 일들로 얻은 깨달음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멈추었던 나의 시간이 주혁과 상혁의 외침으로 비로소 다시 흐르는 것을 느꼈기에 세상 속 움츠린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해주고 싶었다.
"AI 이미지 (by Gemini)"
집에 돌아오면 습관적으로 캡슐커피 한 잔을 내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기록을 이어갔다.
'타닥, 타닥, 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방 안. 커피잔 위로 올라가는 희미한 증기에 잠시 시선을 두고 나를 짓누르던 침묵의 무게를 심호흡을 크게 한뒤 덜어냈다. 문장이 하나하나 이어질수록 나의 시아는 조금씩 선명해졌다. 삶을 기록하는 나의 행위는 허전함을 떨쳐내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스스로를 정화하는 가장 고요한 명상이었다.
때로는 나의 기록이 아닌 지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도 했다. 상혁이가 연결해준 주혁이와의 만남처럼, 나는 누군가의 가장 외로운 순간 '말없이 곁에서 함께 걷는 발자국'이 되어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은 소설 속의 타임루프처럼 비현실적이었지만, 그 메시지만큼은 현실적이고 절실했다. 삶은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기록이 아니라, 서로의 기록을 확인하고 공감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 아닌가 싶었다.
덧없는 첫사랑의 미련에 매달려 시간을 낭비했던 그때의 나,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고 살이 에이는 듯한 슬픔에 한없이 스스로를 자책했던 나였는데 낯선 이의 죽음과 삶을 통해 '삶을 이어가는 기록'의 가치를 깨닫고 멈춰 섰던 나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되었다.
이런 패턴의 하루 하루가 어느새 몇 달이 흘렀다. 나는 깨달음으로 참 많은 기록들을 써 내려갔다. 하루는 며칠 치 기록이 채워진 화면을 읽어내려가다 문득 생각에 잠겼다. 나는 주로 사람들의 위로에 집중해 있었고, 정작 나의 깊은 내면의 문제는 꺼내지 않고 자꾸 방어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왜냐면, 홀로 사색에 잠길 때면 여전히 슬픔과 외로움의 안개가 나에게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 안개의 끝에는 아마도 아내와의 마지막 기억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의 부족함으로 그녀를 불행하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으로 기억을 저 깊숙이 숨겨두고 꺼내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몇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전혀 바뀌지 않고 무던히도 외면하려고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용기 내 사별한 아내의 이야기를 기록해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찾아오는 짙은 우울감이 몰려들어 노트북을 덮었다.
이 감정을 떨쳐내기보다 그냥 마주하려고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수없이 고민했다.
나는 심호흡을 다시 크게 했다. 외로운 공기가 더 이상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옛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사용했던 스마트폰이었다. 전원을 켜고 갤러리 속 그녀의 사진을 열어보았다.
스마트폰에서 갤러리 앱이 열리고, 사진 목록들이 주르륵 불러와졌다. 대부분 딸래미 사진들이었고, 한참을 리스트를 내리고 나서야 몇장의 가족사진들이 보였고 사진속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업무의 연장이라며, 일주일에 5일은 술에 취해 들어오던 남편을 기다리며, 그녀는 늘 이해해주었다. 어쩌면 그녀는 외로움을 감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진들을 보다보니, 병실에서 더이상 눈을 뜨지 않던 그때의 기억도 떠올랐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너와 딸아이만 있으면 된다고 했던 나의 간절한 감정들과 대화가 떠올랐다.
내 탓이라며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자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도 홀로 계속 그녀 옆에서 혼잣말을 하던 그날의 나..
한참을 기억과 기록들을 떠올리고 추억하다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다. 눈물이 흘리진 않았다. 몇 년만에 사진으로나마 그녀를 마주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상실'이 아닌 '기억'과 기록'으로 그녀를 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내 아픔을 그대로 대면하고 스스로의 슬픔이 가득한 안개를 걷어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삶을 포기하려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위로의 글을 기록할 것이다.
"AI 이미지 (by Gemini)"
삶의 기록자여,
당신이 외로움 속에서 써 내려간 모든 문장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기록은 이미 이 세상 어딘가에 닿아 또 다른 생을 지탱할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 펜을 놓지 마십시오. 당신의 가장 절실했던 기록이, 이 세상 가장 눈부신 희망의 서문이 될 테니.